나는 매일 모험을 떠났고, 울진에 점점 물들어갔다
“삶에 지칠 때 나는 이제 울진을 떠올린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잠시 숨통이 트이는 이 기분이 조금이나마 전해진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코로나 시대, 훌쩍 떠나고 싶은 당신을 품어줄 곳으로 ‘울진’을 추천한다. ‘가장 사적인 한국 여행’ 시리즈의 첫 책, 『내게도 돌아갈 곳이 생겼다』는 갑갑한 마스크 속에서도 미풍 같은 여행을 꿈꾸는 당신을 위한 책이다. 저자는 울진의 외갓집에서 할머니와 함께한 일 년을 사진과 글로 엮었다. 저자에게 “미지의 세계”였던 강릉과 포항 사이, 작은 마을 ‘울진’이 어떻게 “죽은 뒤 그 바다에 뿌려지고 싶을 만큼” 특별한 장소로 의미를 더해가는지, 그 일 년의 시간을 저자는 특유의 재치있는 입담으로 풀어냈다.
엄마와 할머니, 두 여자의 땅 ‘울진’
“진복 바다는 좀더 애틋하다. 엄마가 젊은 선생님일 적 진복국민학교에 발령받아 근무했던 이야기를 들어서다. 이야기하며 들떠 있던 엄마의 표정과 목소리가 생각나서다.”
“함께한 시간은 서로에게, 특히 내가 할머니에게 물들어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저자에게 울진은 아름다운 강산 그 이상의 의미로, 아빠와 엄마가 태어난 곳이자 내 엄마의 엄마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터전이기도 하다. 저자는 엄마가 선생님으로 근무했던 곳을 둘러보고, 결혼한 지 4년이 지났을 무렵의 젊은 엄마가 남겨둔 메모를 발견하고는 애틋해지기도 한다. 그런 엄마의 엄마, 할머니는 불쑥 찾아와 함께 살며 여행기를 준비하겠다는 저자, 자신의 손녀를 말없이 품어준다. 할머니와 손녀의 다정한 하루하루에는 웃음과 감동이 있다. “자신은 신물이 올라온다며 잘 안 드시는 고등어”를 손녀 위해 구워내고, 오늘 치 모험을 떠나는 손녀의 자전거가 집 앞 비탈길을 내려갈 때까지 지켜보며 손을 흔드신다. 뭉클하지만 담담하게 풀어낸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할머니와의 일상은 읽는 이의 마음에까지 찡하게 전해진다.
무릇 사랑에 빠지면 흔해 빠진 것도 사뭇 특별해 보인다
“거친 바다 주제에 또 물빛은 한없이 고운 쪽빛이라, 그 대비감이 좋았다.”
“어촌마을 푸른 기와지붕 옆에 소담히 쌓여 있는 진달래색 부표도, 옆 동네 아무개 씨 댁 감청색 대문이 빨간 빨래집게와 이루는 신선한 색 대비도 모두 다음 계절을 기약하는 예고편 같다.”
저자는 자전거 한 대에 맨몸을 싣고 가볍게 울진을 누비며 울진의 풍경과 사랑에 빠지고야 만다. “무릇 사랑에 빠지면 흔해 빠진 것도 사뭇 특별해 보이는 법”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그의 눈에는 이제 보통의 바다도 “고운 쪽빛”으로 눈에 아른거린다. 부표는 “진달래”가 되며, 감청색 대문과 빨개 집게마저 봄의 “예고편”으로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것이다. 저자가 자전거에서 내려 한숨 돌리며 들여다본 울진의 굽이굽이는 사진으로 포착한 듯 선명하고 세세하다. 책을 덮고 당장에 울진으로 달려가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일 정도로!
울진의 시간은 정답게 흐른다
계절이 깊어갈수록, 저자에게 울진은 “어머니의 추억을 거치지 않고도 충분히 애틋한” 장소가 되어간다. 여행길에 만나는 따스한 사람들 덕분이다. 저자에게 막차 시간을 잘못 알려줬던 한 버스 기사님은 노파심에 야외 표지판을 메모판 삼아 “막차는 오후 5시 30분이 아니고 오후 6시 20~25분입니다. 죄송합니다. _버스”라 적힌 쪽지를 남겨둔다.
산 깊고, 물 깊고, 인심 깊은 울진의 사람들 또한 마을에서 우연히 만난 저자에게 “흔쾌히 말동무를 해주고, 당신들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때론 끼니 신세도 지게” 해주었다. 풍경에 반하고, 추억에 반하고, 사람에게 마저 반하니, 울진에 정들지 않을 재간이 있을까.
미지의 세계에서 어쩌면 곧 만나고 싶은 세상으로
‘가장 사적인 한국 여행’은 누군가의 개인적 시선이 보여주는 지역의 재미와 의미를 찾아나선다. 울진이 어디에 위치한 곳인지도 모르겠다고? 『내게도 돌아갈 곳이 생겼다』를 읽은 뒤라면 새롭게 울진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한적하지만 생활이 살아 숨 쉬는 곳, 울진. 곱게 쪽을 진 어느 할머니가 마당을 일구며 손녀를 기다리는 곳이라고. 차 시간을 잘못 알려준 게 미안해 쪽지를 남겨둔 버스 기사가 있는, 정겨운 땅이라고. 어느 작가가 “죽고 나면 뿌려지고 싶을” 만큼이나 아름다운 바다가 있는 곳, 상상만 해도 가슴이 탁 트이는 곳이라고 말이다.
노나리
가능한 한 자주 여행을 떠난다. 낯선 세상과 부딪혀 내 안의 뻔한 틀이 깨어질 때, 비로소 조금 더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국내 최초 그린란드 여행 에세이 <그린란드 지구의 중심을 걷다>, 국내 최초 어린이 대상 그린란드 소개서 <눈과 얼음의 도시 누크>, 학교 밖 청소년들의 솔직담백한 인터뷰 모음집 <어디로든, 무엇이든>, 미얀마 여행기 <같이 걸을까 미얀 미얀 미얀마>를 썼다.
그리고 이제, 언제나 어디론가 떠나고만 싶어 했던 내게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해준 곳, 경북 울진의 이야기를 쓴다.
버스가 비포장의 깎아지른 비탈을 아무렇지도 않게 기어오른다. 우당탕쿵탕, 바퀴에 바위 밟히는 소리가 요란하고 차체는 놀이기구마냥 들썩인다. 양옆으로 선 숲, 나뭇가지들이 버스 몸체를 싹싹 쓸어내릴 정도로 좁다란 길도 무심히 뚫고 간다. 아니 이 정도면 운전 기술이 아니라 운전 ‘무술’ 아닌가…? 버스비를 5천 원이 아니라 5만 원은 드려야 할 거 같은데요? _28쪽, 「겨울 산촌 탐험」에서
첫인상은 이 시기 두메산골답게 그저 황량할 뿐이지만 찬찬히 거닐다 보면 그 고즈넉한 분위기에 절로 빠져든다. 공기는 청량하고, 창백한 햇살은 사방에 파리한 필터를 씌워 이 계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색을 낸다. 시커먼 고목과 바짝 마른 풀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말고는 도무지 고요한 마을 길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노라면 오로지 나 혼자라는 기분에 막막한 한편 평온하다. 외로워서 더 다정한 겨울, 산촌. 지금 여기를 여행할 수 있어 참 다행이다. _32~33쪽, 「겨울 산촌 탐험」에서
이게 보리구나! 겨울에 쌀 떨어지고 나면 다음 가을 추수 때까지 넘어야 한다는 보릿고개의 바로 그 보리구나.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는 처음 봐. 봄 햇살이 작물로 잠시 몸을 바꾸면 꼭 이런 모습 아닐까, 바람에 물결치는 모습이 말 그대로 찬란하다. _38쪽~40쪽, 「농촌의 봄은 참 부지런하기도 하지」에서
“니 우리 정원에 꽃이 얼마나 이쁘게 핐는지 아나. 와서 보고 가라.” 자랑하는 할머니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낭랑하다. 모두들 붙들린 발목에 마음이 뒤엉켜버린 전염병 시국에도 할머니는 당신의 테두리 안에서 하루하루 밭과 정원과 화분을 돌보며 평정을 잃지 않는다. 광합성하듯 홀로 있어도 늘 충만한 당신. 나는 당신의 그 단단한 기운을 그리며 이 시국 속 하루하루를 버틴다. _78쪽~79쪽, 「뿌리 깊은 당신」에서
모전여전인지 나도 생미역이 좋다. 뻣뻣한 줄기를 오독오독 씹으면 쌉쌀하고 짭짤한 바다 맛과 향기가 입안에 확 퍼지는 게 좋다. 깔깔하니 떫은 뒷맛마저 좋다. 외가에 놀러 가 밥상에 생미역이 올라와 있으면 당장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생색을 내며 놀린다. “엄마! 나 지금 뭐 먹게요?” _90쪽, 「나를 살찌운 밥상」에서
밤이 익는다. 할머니가 먼저 “나리야. 자자.” 하기도 하고, 할머니가 깜빡깜빡 조는 모습을 보고 “할머니, 불 끌까요?” 하기도 한다. 티브이를 끄고 형광등을 내리면 순식간에 고요한 어둠이다. 굽은 허리 때문에 항상 옆으로 눕는 할머니 곁에, 나도 옆으로 마주 눕는다. 괜히 할머니 손도 한 번 꾹 잡아본다. 안녕히 주무세요. 오냐. 잘 자. _109쪽, 「그해, 우리의 하루」에서
살다가 마음이 뒤숭숭해질 적엔 핸드폰 앨범을 뒤적여 울진바다 사진들을 본다. 짙푸르고 시푸른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기억 속 세찬 바람과 비릿한 짠내, 천둥 같은 파도 소리를 되짚는다. 동해바다 풍경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냐고, 사진만 놓고 봐서는 여기가 강릉바다인지 속초바다인지 알 게 뭐냐고 따지고 든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내 눈엔 달라. 무릇 사랑에 빠지면 흔해 빠진 것도 사뭇 특별해 보이는 법이잖아. 나는 종종 죽고 나면 가루 한 줌이 되어 이 바다에 뿌려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_122쪽, 「가장 사적인 울진 사진첩 - 사랑하는 울진바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