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걸 시리즈>의 수필집 『내 머릿속에 푸른 사슴』은 근대 여성작가 백신애와 노천명, 나혜석, 강경애의 진솔하고 단정한 마음이 담겨 있는 수필집이다. 네 명의 작가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관찰과 날카로운 통찰과 성찰을 감각적인 문체로 담아내고 있다. 이 책은 일관되게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소소한 행복’을 말한다. 달달한 신혼여행 일화부터 프랑스에서 보내는 정월,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어민들을 향한 애석하고 안타까운 마음, 그리고 그 곳에서 찾아낸 작은 희망까지. 소소한 일상 속에서 찾아낸 삶의 가치가 문장 곳곳에서 반짝이고 있다. 그야말로 현대인이 추구하는 ‘소확행’이라는 단어가 어울릴만한 글로 가득하다. 이들의 글이 험난하고 굴곡졌던 삶처럼 비장할 줄만 알았던 것은 착각이자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읽다보면 어느새 그들과 조잘조잘 수다 떨며 푸른 숲속을 산책하는 기분이 든다. 이 수필집은 네 명의 여성 작가들이 저마다 찾아낸 기쁨과 슬픔, 그리고 깨달음의 기록이다.
현대어로 쉽게 풀어 쓴 근대 여성 문학 <모던걸 시리즈>
100년 전, 고단한 현실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목소리를 글에 담은 여성 작가들이 있습니다. 당시 우리 문단은 여성 작가의 글을 정식 문학으로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그 안에서 여성의 문학은, 아니 여성들은 가부장제에 신음하며 여성의 자유와 권리를 부르짖었죠. 하지만 공고한 남성 중심 문단에서 그 목소리는 비주류가 되었습니다.
100년이 훌쩍 흐른 지금, 그 시절 여성 문학은 여전히 우리의 심연에 잠들어 있습니다. <모던걸 시리즈>를 출간하기 위해 많은 근대 여성 작가의 글을 찾아냈고, 면밀히 살폈습니다. 작품을 선정하면서 현재 출판계의 강력한 흐름이라고 할 수 있는 여성 문학의 본류를 찾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습니다.
<모던걸 시리즈>에 실린 모든 작품은 편집자가 직접 현대어로 번역했습니다. 원문의 뜻이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현대의 독자들이 읽는 데 거리감이나 어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과감하면서도 새로운 번역을 시도했습니다. 원문을 있는 그대로 감상하기를 원하는 고전주의적 독자들에게는 이번 시리즈가 과감함을 넘어 함량 미달의 어떤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고귀한 소수의 문학이기보다 어떤 언어로 담기든 다수의 문학이 이 시대 독자들에게 더 유익하다고 믿습니다. 현대의 시선으로 큐레이션하고 현대의 언어로 담아낸 작품들은 분명히 오늘을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작지만 긴 여운을 선사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모던’한 시대를 살고 있고 ‘지금 여기’의 여성 모두가 모던걸입니다. ‘모던걸’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키워드입니다. ‘모던걸’이라 불렸던 근대 여성들은 유교적 억압에서의 해방과 표현의 자유,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했고, 이 책에 담긴 작품들은 그 흔적입니다. 여성들의 억압에 대한 투쟁의 역사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 작품들이 거창한 주제를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첫사랑, 애정하는 것, 다정한 시골 풍경, 보고 싶은 엄마 등 정겹고 익숙한 소재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런 주제조차 여성의 펜 끝으로는 표현하기 힘들었던 시대에 탄생한 작품들이기에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으며 그때의 감정들이 현재와 다르지 않음을 느낄 때 우리는 먼 시간을 뛰어넘어 강한 유대감을 느낍니다. 이 시리즈가 여전히 모던을 꿈꾸는 독자에게 기분 좋은 배부름이 되기를 원합니다.
강경애
1906년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났다. 1920년 평양 숭의여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동맹 휴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 이후 1923년 동덕여학교 4학년에 편입하여 1년간 공부하였다. 1931년 단편 소설 「파금」으로 문단에 데뷔하였고 같은 해에 장편 소설 『어머니와 딸』도 발표하였다. 이외에도 『인간 문제』, 「지하촌」, 「원고료 이백 원」, 「소금」, 「어둠」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나혜석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1913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1918년 도쿄시립여자대학교 유학과를 졸업하였다. 1914년 『학지광』이라는 잡지에 「이상적 부인」을 발표하면서 창작활동을 시작하였다. 대표 작품으로는 「회색한 손녀에게」, 「모된 감상기」, 「원한」, 「이혼고백장」, 「현숙」, 「신생활에 들면서」등과 연재 시 「인형의 집」등이 있다.
노천명
1911년 황해도 장연군에서 태어났다. 1930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진학하였다. 재학 중에 시를 배워 교지를 비롯한 여러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하였다.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에서 기자로 근무하였다. 작가로서는 1932년 「밤의 찬미」를 발표하며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저서로는 시집 『산호림』, 『창변』, 수필집 『산딸기』, 「나의 생활백서」등이 있다.
백신애
1908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문과 여학교 강의록으로 공부하였고, 대구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하였다. 영천공립보통학교 교원에 이어 자인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여성 동우회, 여성 청년 동맹 등에 가입한 것이 탄로 나 해임 당했다. 1929년 조선일보 「나의 어머니」가 당선되어 등단한 이후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34년 「꺼래이」를 발표하면서부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정현수」, 「정조원」, 「적빈」, 「광인수기」, 「소독부」, 「홍명」등을 썼다.
P.11 벌써 신혼이라는 그러그러한 때가 저 먼 옛날같이 되어버린 이때에 새삼스럽게 달콤하고 아기자기한 신혼 여행기를 쓰라는 주문을 받고 펜을 들게 되니 공연히 웃음만 납니다. 대체 쓸 만한 거리가 기억에 남아있어야 될 터인데 잊어버렸는지, 아니면 눈을 감고 여행을 했는지 좌우간 여행기가 될 만한 것이 도통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 백신애, 「슈크림」 중에서
P.51 작가란, 작품 활동에 있어서 놀고 있는 것같이 보여도 머릿속에서는 늘 바쁘게 일을 하고 있다. 무엇을 노래할지 찾고 있는 것이며,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서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내 머릿속에 이런 푸른 사슴을 자유롭게 놓아기르기 위해서는 최소한도의 생활 보장이 되어야만 가능하다.
-노천명, 「직장의 변」 중에서
P.78 복잡한 현실에서 우리는 가끔 다른 데를 보며 쉴 필요가 있다. 같이 앉아 있는 방안의 사람이 보기 싫을 때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야 하겠고, 이런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장독이라든가 궁기가 낀 살림 부스러기가 아니고 모름지기 한 그루의 싸리나무다.
- 노천명, 「5월의 구상」 중에서
P.116 유럽인의 생활은 성적 생활이라고도 볼 수 있다. 더구나 파리같이 외적 자극과 유혹이 많은 곳이 있으랴. 이들의 내면을 보면 별별 비밀이 다 있겠지만 외면만은 일부일처제로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사실이다. 아무래도 자유로운 곳에 참사랑이 있는 듯싶다.
- 나혜석, 「프랑스 가정은 얼마나 다를까」 중에서
P.131 이번에 내가 여기 온 것은 저들의 생활을 탐구하기 위함이었다. 이 부르짖음으로 가슴이 뜨겁게 흔들렸다. 오냐, 작가로서의 사명이 뭐냐. 이 현실을 누구보다도 똑똑히 보고 또 해부하여 작품을 통해 대중에게 나타내 보이는 데 있는 것 아니냐. 예술이란 그 자체가 민중의 생활과 분리되어 있으면 무슨 가치가 있으랴.
- 강경애, 「몽금포 구경」 중에서
<모던걸>의 저자들은 오늘의 우리가 이 글을 읽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모든 글은 필연 미래를 향해 쓰이고, 모든 독자는 과거의 작가와 만나기 때문에. 그렇기에 우리의 독서는 먼 어제의 모던걸에게 보내는 응답이기도 하다.
근대 문학의 가장 먼 어제로부터 당도해 온 이 글들은 경이롭게도 우리의 오늘을 반영해 내고, 이 글들을 읽는 동안 우리는 ‘이런’ 오늘이 만료되고 더 나은 내일이 오기를 바라는 한패가 된다. 따라서 이러한 선언이 가능해진다.
<모던걸>을 읽음으로써, 우리 또한 모던걸이 된다.
- 소설가 박서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