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원점이 있습니다. 책 <원점.>은 373일간 지구 한 바퀴를 돌며 자신만의 원점을 찾아가는 여행 산문집입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담담하게 자신만의 여정을 걸으며, 다시 거울 앞에 마주 서기까지의 과정을 25개의 에피소드로 담았습니다. 삶이 팍팍하고 자극적이기만 한 요즘, 담백하고 삼삼한 여행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원점.> 꼭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
김진규
373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현재는 매주 새로운 도전을 하며 일상을 채워나가고 있습니다. 이 책도 도전의 작은 결과물이며, 시작을 함께해준 모든 분들께 감사한 마음입니다.
- 콘텐츠 디렉터. 콘텐츠 스튜디오 라미 대표. 공공디자인 스튜디오 도트비 PD. 한양대학교 광고홍보학과 졸.
매일 밤, 매주 일요일, 매년 12월 31일. 달력 속 크고 작은 원점들을 경험했다. 하지만 나만의 원점은 없었다. 좋은 죽음이 과연 있을까? '죽음'을 경험해볼 수는 없지만, '끝'을 겪어볼 수는 있었다. 내가 낳은 시작과 끝. 우선 그것을 경험해야 한다. 그저 끝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끝을 겪어보기 위해서. – 본문 11p
당장 치일 것 같지만 않으면 바로 곧장 반대편 다리를 내디뎠다. 그러자 오토바이는 알아서 속도를 줄이며 나를 피해 지나갔다. 오호, 신기했다. 결국 한 걸음. 한 걸음이 중요했다. 보통 위대한 한 걸음은 용기로부터 나온다고들 하지만, 나의 한 걸음은 성급한 짜증에서 나왔다. – 본문 20p
그때, 갑자기 계단에서 쿵쿵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덩치가 큰 사내 세 명이 종업원 뒤에 섰다. 확실히 상황은 역전되었다. 열탕에서 냉탕으로 순식간에 빠져드는 듯 온몸이 굳었다. 하지만 이미 내가 보여준 모습이 있기에 그대로 무서운 감정을 드러낼 순 없었다. 체면이라는 게 더 무서운 것이었다. 이미 기선 제압을 한 김에 종업원이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선수를 치기로 했다. – 본문 53p
순식간에 노을 앞 능선에 선 바이커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일행을 기다렸다. 나는 카메라를 들어 처음 보는 그들을 뷰파인더에 담았다. 그중 한 바이커가 내 카메라에 엄지를 번쩍 치켜세우고는 낙하하듯 붉은 노을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은 낙하하는 새들처럼 멋지게 멀어졌고, 나는 그들을 보며 노을을 즐기는 또 한 가지의 방법을 알게 되었다. 물결 위 발자국을 저렇게도 남길 수 있구나! 잡념들이 진눈깨비처럼 녹았다. – 본문 89p
몰입의 에너지. 내가 이런 에너지를 가져본 것이 얼마 만일까? 어쩌면 내가 공허감을 느꼈던 것의 원인이 이러한 순수한 몰입의 부재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분명 날 때부터 이러한 호기심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말이다. 호기심은 달콤하고 때로는 엉뚱해서 마치 젤리처럼 철없는 이들의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철이 들수록 무채색으로 변해가는 일상에 때로는 겁이 나, 몽글몽글했던 어린 날을 되돌아보기도 하지 않나. – 본문 133, 134p
그렇게 가장 겁을 냈던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겁은 왜 날까? 경험에서 오는 고통, 상처 따위의 부산물을 생각해보면 된다. 한 번의 실행이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오면 우리는 쉬이 고통 혹은 상처를 얻는다. 그리고 그것들이 머리나 가슴에 잔상으로 남아 겁으로 번진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겁이 없어질까? 글쎄, 잘 모르겠지만 우선 지금 있는 부산물들이 또 다른 실행을 막아서는 잔상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 본문 165, 16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