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을 소재로 한 책들을 읽고 쓴 독서 에세이
별다른 제약 없이 레몬과 관련이 있는 책들을 골라 읽었다. 순수한 읽기의 즐거움을 누리며 쓴 글들이다. 제목이나 본문에 레몬이 들어 있는 소설, 그림책, 산문집, 희곡, 독립잡지, 요리책 등을 읽고 떠오른 생각과 관심사를 솔직하게 적었다. 몇몇 음반과 노래도 포함되었다. 표지를 간략하게 그린 드로잉을 곁들였다.
‘레몬’을 키워드로 책을 검색하는 과정에서 절판되었거나 출간된 지 오래되어 잊힌 책들을 발굴하여 새로이 소개할 수 있었다.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은 영어와 프랑스어 책도 원서로 읽고 소개했고, 다양한 책에서 레몬이라는 소재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살펴보았다.
작가는 ‘레몬 책’들을 접하면서 평소 같으면 읽지 않았을 책들을 읽었고, 몰랐던 작가들을 만났으며, 레몬 덕분에 사고와 독서의 폭을 조금은 넓힐 수 있었다고 한다. “레몬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책을 읽고 책을 사랑하는 이야기이다.”
독서 에세이 중에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읽거나 말거나》(봄날의책 2019)를 좋아한다. ‘읽거나 말거나’라니, 책을 읽는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라는 신조를 내세우고 있어 동질감을 느낀다. 쉼보르스카는 자신의 글을 “비필독도서 칼럼”이라 부르며 “본질적으로 나는 독자로, 아마추어로, 그리고 뭔가의 가치를 끊임없이 평가하지 않아도 되는 단순한 애호가로 머물길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한다. 《레몬 편지》에서 나도 매끄럽고 보편적인 ‘서평’을 만들어 내기보다는 내가 읽고 생각한 바와 내 관심사를 솔직하게 적었다.
‘레몬 책’들을 읽고 글을 쓰는 동안 평소 같으면 읽지 않았을 책들을 읽었고, 모르는 작가들을 만났다. 레몬 덕분에 나의 사고와 독서의 폭을 조금은 넓힐 수 있었다. 레몬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책을 읽고 책을 사랑하는 이야기이다. 간혹 쓰고 싶은 이야기를 좇다가 레몬에서 조금 벗어난 적도 있었다. 독자 여러분도 《레몬 편지》에서 혹은 다른 어딘가에서 소중한 레몬 하나쯤 만나게 되기를. (6~7)
라임 피클을 가진 자는 강자, 라임 피클이 없는 자는 약자가 된다. 라임 피클을 얻기 위해 소녀들은 반지를 선물하고, 파티에 초대하고, 산수 문제의 답을 알려 준다. 대다수 소녀가 라임 피클을 가져오지 말라는 선생님의 규칙을 자주 어기지만, 발각된 에이미는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잘못에 비해 지나친 벌을 받는다. 인간 사회의 축소판이다. (9)
“라벤더색, 크림색, 분홍색 장미는 생각만 해도 아름다웠다. 어쩌면 그런 색의 들장미가 있을지도 모르지. 그는 작은 풀밭에 핀 들장미 노래를 떠올렸다. 하지만 초록 장미는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어쩌면 세상 어딘가에 초록 장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A Portrait of an Artist as a Young Man by James Joyce) (16)
단편 〈레몬〉은 사건보다 의식의 흐름이 더 중요한 작품이다. 가난에 시달리고 건강이 나빠지는 상황에서 극도의 무기력과 불안감을 주변 풍경과 더불어 서술한다. 막힌 골목에서 서성이는 기분이 레몬 하나를 사서 돌아다니면서 나아진다. 레몬의 색, 모양, 촉감, 향이 경쾌한 설렘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탈출구를 찾은 듯하다. 레몬에서 시작된 발상은 별것 아니지만 엉뚱한 상상과 행동으로 이어진다.
이 단편에서 내가 좋아한 문장은 이런 것이었다. “화집을 한 장 한 장 들여다보고 난 후에 지나치게 평범한 주변을 둘러볼 때의 그 이상하고 어색한 기분, 예전에는 그 기분을 즐기곤 했다…….” 분명히 느껴 보았는데 지나치기 쉽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변화. 그것을 포착하는 날카로운 시선이 좋다. (27~28)
안데르스가 그토록 마츠 이스라엘손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49년 동안 보지 못한 남편을 젊은 시절의 모습 그대로인 시신으로 만난 여인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 여인처럼 바르브로는 젊은 안데르스를 연모하고 가슴 깊이 간직해 왔으며, 결국 안데르스가 죽은 뒤에야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안데르스가 마츠 이스라엘손 이야기에 집착하는 것, 안데르스와 바르브로가 삶의 끝자락에 다다라서도 젊은 시절의 작고 사소한 추억을 붙들고 사는 모습을 보고 나는 김연경의 중편 소설 〈미성년〉을 떠올렸다.
“그도 그 문장을 열렬히 사랑하지 않았던가. 작가가 3초도 생각하지 않았을 그 문장에 매달려 지금껏 살아오지 않았던가.”
우리도 때로는 “작가가 3초도 생각하지 않았을 그 문장에 매달려”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41~42)
미미가 사는 세계는 기차역, 언덕, 공원, 백화점, 미술관이 있고 집에서 고양이와 함께 사는, 우리 세상과 비슷한 곳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하늘의 빛깔이 노랑, 초록, 자주색으로 시시때때로 바뀌는 세계, 담요가 말을 하고 찻주전자가 얼굴을 찡그리고 구두가 도망치는 세계이다. (...)
원서 제목은 ‘오스카와 미미’인데 우리말 번역본의 제목 ‘나의 레몬 하늘’이 더 마음에 든다. 개집이 싫어서 도망친 오스카가 기차에서 내렸을 때, 그리고 오스카와 미미가 처음 마주쳤을 때의 하늘이 레몬빛이었다(“하늘이 노오란 레몬 같았을 때”). (44~45)
인간도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갈망에 시달린다. 많은 사람이 그것을 억누르거나 잊고 산다. 하지만 그 갈망을 어떻게든 채워 보고자 본업을 마치고 남는 시간에 무언가를 끈질기게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고 예술을 창조하기도 한다. (49)
한번 일어난 일은 반복될 수도 있겠지만,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미 일어난 일은 기억되지 않는 한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과거에 존재했던 대상이 영원히 그 자리에 남아 있으리라는 법은 없다. 따라서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86~87)
‘레몬’을 키워드로 책을 고르고 읽고 생각하고 쓰고 싶은 이야깃거리를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글을 쓰면서, 최근에 이만큼 행복했던 적이 있었나 하고 새삼 놀랐다. 첫 독자인 텀블벅 후원자께 미리 공지하고 약속한 기획이기는 하지만, 단지 내가 하고 싶어서 자신에게 부과한 일이었기에 순수한 읽기의 즐거움을 온전히 누릴 수 있었다. 대부분 내 마음에 드는 책을 골랐고 글이 막히지 않고 술술 써졌다. 한번 쓰기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끝내고 나서도 계속 읽고 쓰고 싶어졌다. 아마도 다른 키워드로 비슷한 작업을 계속할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소재나 주제를 잡아서. (89~90)